[하나님의 편지]-예레미야(1/3)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에게...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고통에서 너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네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에도 나의 선함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는 것과, 앞으로 선한 계획이 펼쳐질 거라는 소망을 주겠다고는 약속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 스스로 황폐해지고 공허해져도, 또는 너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게까지도 나의 선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이것이 네게 약속한 풍성한 삶이다.
너는 먼저 내가 전하는 나쁜 소식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에 전하는 좋은 소식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다. 너는 이것을 기억하면서 이번 편지를 읽어 내려 가거라.
나는 네가 인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도록 창조했다. 그러나 너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19세기판 예레미야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이 점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성경이 내가 귀 있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라고 말했지만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을 위한 헤드북" 이라고도 말했다.
또한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자기가 처한 문화에 맞서서 이렇게 말했다. "철저히 낮아지고 망가진 사람이, 자기의 유일한 위안은 오직 목숨을 끊는 것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결론에 도달할 그 때 비로소 기독교가 시작된다."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데 옆에서 예레미야가 활짝 웃으면서 '아멘'이라고 하는구나.
키에르케고르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전했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당시 덴마크 교회에 아래와 같이 전했다. 덴마크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이 메시지를 싫어했고, 비아냥 거리며 키에르케고르를 조롱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 가는 것은 죄의식이다."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크고 작은 죄를 늘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죄의식 없이 나를 가까이 느낀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죄가 곧 네 자신이 되고, 네가 곧 죄 그 자체가 되니,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고,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은 네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호세아서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타국인들이 그의 기력을 삼켰으나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참으로 흰 머리가 그에게 여기저기 생겨도 그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의 얼굴에게 증언하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그분을 찾지도 아니하는도다."(킹제임스흠정역/호세아7:9-10)
죄를 의식하지 못함이 곧 교만이다. 나는 교만한 자를 미워한다. 죄의식이 없는 것은 흰 머리가 여기저기 생겨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혼에 백발이 핀다는 것은 네 영혼이 시들어 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네가 죄를 의식하면 너를 정결케 하는 거룩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불은 나의 선함을 믿는 믿음이고, 나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불변의 소망이며, 나를 향한 사랑의 갈망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은 진리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오늘 네게 보내는 스물 네 번째 편지인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다.
(1) 요시아 왕이 율법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요시아는 자신과 자기의 백성들이 나의 율법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는 백성을 이끌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성대한 유월절을 베풀어 기념했다(대하35:1, 18). 그러나 내 백성은 예배하는 시늉만 했다(3:10). 시늉 뿐인 그들의 찬양은 내 귀에 거룩하지 않은 소음일 뿐이었고(7:1-8), 불신을 치장 된 신뢰는 내게는 악취일 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적인 고통에서 내가 자기들을 당연히 지켜 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종교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가는 그 종교가 자기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는 환상에 빠져갔다(7:9-11). 이렇듯 그들은 나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다. 너는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만 듣지 말고 네 자신이 내게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며 너의 지난날을 돌이켜 봐야한다.
(2) 나를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선지자들도 방탕한 사랑으로 거룩함 없이 축복 했으며, 죄를 지어도 벌이 없다는 거짓된 복음을 전하였다(28장). 당시 내 백성들은 그런 거짓말을 좋아했다. 네가 살고 있는 지금 세대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번영으로 가득한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나쁘거니와, 이에 미혹되어 최면 걸린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매우 미련한 것이다. 그들에겐 화가 있을 것이다. 멸시 받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며, 산고를 겪는 여자의 소리를 낼 것이고, 스스로 탄식하며 내 영혼이 지쳤노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5:30-31). 네가 그리하여도 이 모든 화는 동등하게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죄의식을 안고 내게 나아와야 한다. 너는 깨어 회개해야 한다.
(3) 나는 예레미야에게 백성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말했다(7:16, 11:14, 14:11). 거룩한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막혀 있는 모든 담을 다 허물어야 한다는 걸 예레미야를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그는 내가 내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서 내 아들을 상하게 하고, 멍들게 하며, 아프게 하고, 찔리게 하여, 죽게 할 거라는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죄는 반드시 심판 받는다.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워 그것들을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하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킹제임스흠정역/ 예레미야 1:10).
(4) 예레미야의 갈등을 자세히 읽어 보거라. 그는 내면의 고뇌를 여섯 번에 걸쳐 표현 했다(11:18-23, 12:1-4, 15:10-21, 17:12-18, 18:18-23, 20:7-18). 예레미야에게도 네가 느끼는 두려움이 있었다. 한번은 자신을 생명을 주는 물의 근원이 말라 버린 우물에 비유했다. 나는 그 때 딱 한번 예레미야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나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 정도가 아닌, 그 보다 더한 끔찍한 두려움에서 예레미야를 구해냈고, 그를 구하듯이 너도 구해냈다. 나는 너를 믿음 없는 불신앙에서 구해냈고, 소망 없는 절망과 사랑 없는 자아몰입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내 아들은 네가 믿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삶은 혹독한 시험을 통과한 믿음과 심각한 도전을 받은 소망, 그리고 고통스러울 만큼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믿음의 부족과, 절망에 빠져 소망을 잃어 가는 것과, 식어가는 사랑에 대한 눈물 어린 갈망'을 놓고 내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며, 내 아들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벽별이 가장 빛나는 시간은 밤이 가장 깊을 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계속 읽어가거라. 진정한 기독교는 폐허속에서 시작된다. 내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다. 나를 향한 소망과 사랑, 내 아들에 대한 믿음을 지켜 나간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과 학대를 자행하고 있으며, 부모가 보는 앞에서 그들의 어린 자식을 칼로 난도질 하고, 총으로 난사하여 죽이고 있다.
지금 내 옆에는 2015년 이맘 때에 고문 당하다 죽은 너희 모두의 자녀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내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고, 내 아들과 함께 웃으며 춤추고 있다. 나는 너와 너희 모두에게 긍휼 베풀기를 원한다. 너는 이 편지를 네 가슴에 깊이 새겨 내 아들에게 가는 길의 안내자로 삼거라.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SN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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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_개역개정, KJV흠정역
*Special 목자성경_로고스
*[66 Love Letters]_Larry Crabb
(Republic of Korea:IVP)
*The chokmah commentary_기독지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