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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13-14 [복음(福音) : 명제(命題)로 말하다]-3

Adullam 2022. 4. 22. 07:06

[디모데후서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복음(福音) : 명제(命題)로 말하다]-3

인간의 이성과 명철, 지식과 견해, 역사와 경험, 연구와 발전, 철학과 논리, 인문과 집단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물들은 눈으로 거의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발견해 낸 그 결과물들을 신뢰하고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것도, 마른 뼈와 같은 인생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온전케 된 새 사람으로 회복시키신 것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사람이 신뢰하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람이 신뢰하지 못 하는 이것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교만하고 악한 마음?, 완악함에서 비롯된 고의적인 거부감?, 그 이유가 인간의 입장에서 타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어리석고 무식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타까움 보다는 거룩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로써의 삶의 모습은 천향지차를 보입니다. 때로는 삶의 질이 완전하게 뒤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육신으로 사는 동안 선택한 결과는 죽음 이후의 영생과 영벌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대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살아갈 지역을 선택합니다. 잘 못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웬만한 것은 정정도 가능하고 즉시 취소도 가능합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회복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부의 대가를 치르기도 하지만 어쨌든 돌이킬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가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의 죽음과, 죽음 뒤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심판 뒤에 있을 영생과 영벌은 육으로 살면서 선택한 것들에 대한 최종 결과이기 때문에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진짜 예수쟁이로 불릴만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선택해야 할까요?, 이나면 예수쟁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자가 되기를 선택해야 할까요? 두 말 할 것도 없이 전자입니다.

필자는 인간의 철학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인류의 근대사는 철학과 계시를 놓고 싸워 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고등적인 비평을 철학에 기초했습니다. 특히 카톨릭은 인간 철학을 성경에 가미하는 중차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인간 철학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카톨릭의 권위 여부를 염두해 두지 않습니다.

태곳적부터 인간과 문화의 탐구는 지혜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고난의 대명사이자 축복의 대명사로 꼽히는 성경의 욥은 욥기서 28장 12-13절에서 해묵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지적능력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생각하고 반추하며 지혜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혜(wisdom)에 주목하지 않았고 영리함(clevemess)에 관심을 기울여 욌습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선택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가 있습니다. 문제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합리적 요소보다 강하다는 데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악을 행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결심한 뒤 반복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후회감으로 비참해지다가도 이것이 반복되면 죄에 대해 무뎌집니다. 비합리적 요소를 조종하는 세력이 육신의 욕구와 충동과 직감이기 때문에 가치실현을 위한다는 얄팍한 합리성을 명분으로 비합리적인 요소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둠의 그룹에 속한 인류 대부분은 비합리적 요소에게 승리를 안겨다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로마서 7:18-24에서 말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비합리적인 요소는 합리적으로 세워가려는 유토피아를 허물어 버립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은 결코 패배자로 남지 않습니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기준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 또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데 완벽한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기 때문입니다. 17세기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성은 미묘한 인간관계나 어떤 영광스러운 경험들에 대해서는 쉽게 정의 내리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완벽한 지적 체계를 통해 사물의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증주의자입니다. 그런 그의 눈앞에 형언 할 수 없이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펼쳐집니다. 그 때 그의 가슴 속에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감동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또 다른 그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감각인 것입니다. 즉 펼쳐진 존재에 대한 감각은 곧 나를 존재하게 하는 감각이 되는 것이고, 모든 존재는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세상 마지막 그 날까지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입니다. 구원의 경륜은 세상의 시작과 끝날까지의 과정을 믿음의 역사로 써내려간 총체적인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명제로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입에서 담대하고 당당하게 명제로 선포 되어지는 복음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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