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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5-6 [축복의 대명사, 욥]-2/2

Adullam 2022. 3. 20. 06:58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축복의 대명사, 욥]-2/2

욥의 무지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새번역성경/42:2-6).

'인간의 아는 바'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철학자도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질문으로 시작하여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철학은 질문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이 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없습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답이 무엇인지를 세상의 학문에서는 알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답도, 인생의 답도 신학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과, 재림을 통해 최후의 심판을 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경륜을 아는 것이 해답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는 십자가 복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에는 영생의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은 순종의 행함을 통해 영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를 주라 시인함이 성령으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정답은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십자가 복음의 증인된 순례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는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살피며 연구합니다. 하지만 밤낮 뚫어지게 쳐다봐도 하늘의 별이 몇 개인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문명의 바벨탑이 발달 되어가도 인류 종말의 경고음만 커질 뿐 하나님의 창조세계,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전히 캄캄한 어둠일 뿐입니다. 슈퍼컴퓨터 앞에서 주판알 굴리는 모습이고, 항공모함이 떠나니는데 뗏목 만들었다고 좋아 날 뛰는 수준입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에 대하여 그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며, 심령을 감찰하시며,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시지만, 사람은 다 안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살아갈 뿐입니다. 장례식장 가서도 자신은 죽음과 거리가 먼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영정사진 액자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가게 될 거란 생각조차 안 합니다.

육의 죽음 뒤에 영원한 영계가 있슴을, 그 영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있슴을, 천국은 생명의 부활이요 지옥은 영벌의 부활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가 따갑도록 전하고 또 전해도 동네 개 짖어대는 소리로 취급하고 손사래치며 난 지옥 갈테니 너나 천당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심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엾고 불쌍한 인생들 입니다.

심지어 한 치 앞도 모르는 그들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열 달 쯤 전에 알지만 죽을 때는 그 때를 모릅니다. 많이 배워서 많이 안다는 세상 지식의 교만에 빠져 있을 뿐,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도 잘 알고 세상도 잘 안다는 확신에 찬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호하게 "너는 무지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놀라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우리의 신앙도 듣는 것에서 끝나는 수준이 맞을 것입니다. 듣기는 듣습니다. 졸면서 듣고, 때론 정신 차려 듣기도 하고, 간혹 깨닫기도 하며, 은혜도 받고, 가끔은 숭고한 가치임에는 아니다 말 할 수 없는 '믿음의 결단'을 하기도 합니다. 안 하던 기도도 시작하고, 아깝다는 생각에 드리지 못 했던 십일조도 드리고, 중단했던 봉사도 재개하며, 그야말로 적성에 맞지 않고 자신도 없는 전도도 해 봅니다.

간혹, 일생에 몇 번, 모처럼의 결단에 의하여 감성적으로 뜨거웠다 식었다 하면서, 또는 이성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고 계산하면서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아멘'도 합니다. 교회에 오랜세월 다녀 장로 권사도 되고, 소명에 의해 목사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것이 오해임에도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우겨대는 억지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동방의 의인이며 거부인 '욥' 역시도 자기는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욥을 향하여 "네가 무지하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욥은 이게 뭔가 싶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엄청나게 들어왔으면서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귀로 듣는 것만이 전부인 신앙이라면 그것은 분명한 반쪽 신앙입니다. 반쪽신앙인의 그 절반은 세상 섬기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참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던 욥도, 눈으로 주를 보게 된 후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며 '주여 주여' 하는 우리들 역시, 제대로 아는게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지, 확실히 믿기는 하는지 돌이켜 점검 해 봐야 합니다.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