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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6 [비판은 자기모순(自己矛盾)이다]-2
Adullam
2022. 1. 26. 08:04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비판은 자기모순(自己矛盾)이다]-2
비판은 동료나, 이웃이나, 심지어는 친인척 및 가족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 폭력입니다. 주관적 잣대로 상대를 재고 재단하면서, 약점과 허물을 들춰내 험담하고 공격합니다. 심할 경우 공격 받은 사람은 일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악성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여겼지만, 남을 비판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가 교만한 도구로 악용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킹제임스흠정역/마 5:2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자로 그 신분을 바꾸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계십니다. 즉 사람은 모두가 동일한 피조물일 뿐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문제는 각자의 문제일 뿐이고, 이에 대한 책임도 각자 지게 되니, 사람은 사람을 비판 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자유롭게 창작하는 사람입니다. 소설가의 경우 주제를 담을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이끌어갈 작 중 인물들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과 성별, 직업과 지위, 성격과 취미를 덧 입힙니다. 또한 스토리 전개를 위한 절정(絶頂), 반전(反轉), 결말 등의 설정을 구상(構想)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작가가 하고 싶은 대로 전개해 나갑니다. 인물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것을 비롯해서,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 등,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행복과 불행 등의 모든 운명을 절대적으로 작가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마치 하나님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작가는 독자와 시청자들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스토리 및 영화나 드라마의 각본을 흥미롭게 전개하는 데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세계의 걸작품인 사람을 살리는 데 목적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영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자로 신분을 바꾸어주는 게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의인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께 지어진바 된 사람은 다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자기 모순에 빠져 살아갑니다. 연약하고 귀도 얇아서 사단의 미혹에 쉽게 넘어 가고, 야비하고 교활한 면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상대로 비판하고 경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모순적인 비판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절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또, 법 없이 살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해도 죄인을 대할 때는 그를 질시(嫉視)하고 멀리합니다. 이게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희생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인칭'인 자기 자신을 잣대의 중심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칭대명사에서 가장 소중한 건 언제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1인칭, '나'자신 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나 하나 빠지면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IQ가 심각하게 낮고, EQ가 뒤범벅에다 발달장애가 심하고, 환경은 칠흑같이 어두워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2인칭이나 3인칭은 언제나 나만큼 소중한 가치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인칭과 3인칭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배타, 미움과 비난과 무시와, 심지어 학대와 저주를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1인칭 보다 2인칭과 3인칭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결함 투성이인 죄인이고 뭐 하나 의로운 구석이 없어 지옥 보내기에 딱 좋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려 하시기에 2인칭, 3인칭의 그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를 성도의 실천규범에서 이행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하고, 나에게 소송 걸어서 하나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아예 두 개를 주고, 강제로 5리를 가자고 하면 오히려 10리를 동행해 주고, 어떤 사람에게서 작은 결함을 발견하였다면 그를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반면교사 삼아 나에게는 더 큰 결함이 없는지 돌아봐야 할 것" 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윤리를 이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실한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명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비판의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판의 성격이 아닌, 책망의 성격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마음으로 건전하게 책망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고 존재의 목적을 망각해 갈 경우에, 이를 보고 눈을 감아버린다면 오히려 이것은 영적 방조죄에 해당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교회여 회개하라!“를 외쳐야 하고,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책망하는 자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앙적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하합니다. 또한 책망하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비판을 금하셨지만, 이러한 책망까지 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하나님은 교만하고 불의하며 불순종한 자들에게 어김없이 경고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교회도 성도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책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릇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망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생명이 떠난 교회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악과 결탁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성도들에게서 일어날 경우,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하기 위한 책망과 권면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여 말로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계속>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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