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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5-8 [골방에서 기도하라]-2

Adullam 2021. 12. 15. 07:23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골방에서 기도하라]-2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잘못된 부분' 두 번째는, 중언부언 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란 뜻의 헬라어 '밧톨로게오'는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거나, 의미 있는 말이라도 생각 없이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규격화 된 내용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설득 하듯 하는 것도 중언부언 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 시간을 억지로 오래 끄는 사람을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누구든지 이런 잘못된 기도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반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긴 시간을 반복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세 차례 반복한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 십자가 죽음을 앞 둔 예수님의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세 번 반복 한 것으로 한정 짓는 것은 오히려 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동안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말씀을 열 번, 스무 번 이상도 하셨을 것입니다. 이 기도에 모든 것을 담아 내셨습니다. 땀에는 피가 섞여 흘러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중간 중간에 막힘없이 아무 말이나 계속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만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한다는 사람을 보면, 주요 내용 하나를 기도하기 위해 그 앞에 형용사 열 개, 스무 개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무소부재 하시고, 온유하시며, 무한하신 사랑이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 그런 다음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시고, 온 땅에 충만하시며,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고, 세상의 진리로써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시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한참을 형용하고, 또 다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그 뒤에 또 다시 하나님을 형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두무 한 모 만한 크기의 뇌에 창조주 하나님을 담으려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즉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그에게 응답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골방은 글자 그대로 아무런 방해 없이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나 밀실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맘껏 교제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어디든지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번잡한 곳을 피하여 산이나 들판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골방이었습니다.

골방의 기도는 심오한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을 만날 때 교제의 방법과, 대화의 내용과, 대면의 질을 다르게 합니다. 한 예로, 저명인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절차를 거치기도 합니다. 만나는 방법과 장소 등도 주로 저명인사가 정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가까운 친구라도 만남의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자주 만나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조용한 곳이 있는데 그 곳에서 차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말해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못 합니다.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경우는 눈에 아직 콩깍지가 떨어지지 않은 연인들입니다. 그들은 시키지 않아도 단둘이 앉아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 없는 데만 찾아다닙니다. 특별히 사이가 좋은 잉꼬부부도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갖습니다.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사람 많고 음악소리 시끄러운 파티장의 두 남녀가 슬며시 복잡한 곳에서 빠져 나가 조용한 해변가를 거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애정이 없는 부부는 골방에 둘이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어쩌다 아내에게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이야기 해도, 뭔 재미로 가냐고 핀잔을 주기 일쑤입니다. 즉, 골방에서 만나는 사이는 웬만한 관계 갖고는 어렵다는 뜻이고, 골방에서 만날 수 있을 만한 필요충분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골방은 우리의 마음을 영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고 복잡하여 우리의 생각이 분산 되기 쉬운 곳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마음을 골방에서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도 골방에서 표현하고 싶어하십니다. <계속>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