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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36-42 [정신차리고 깨어나라]
Adullam
2021. 11. 9. 07:19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정신차리고 깨어나라]
종교재판 법정에서 피에르 코숑 주교는 19세의 잔다르크에게 산 채로 화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흰 남성용 전투복을 입고 싸운 그녀의 여성 복장 거부는 교회에 대한 불복종이며, 불복종은 곧 이단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1431년 5월 30일 프랑스 루앙의 시장터,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하여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16세 소녀 잔 다르크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부당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천주교)의 권력이 이토록 대단한 수위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 신분의 신부가 감히 교황과 교회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성당 정문에 게시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사흘을 금식기도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남긴뒤 자기 민족을 위하여 페르시아 왕 앞에 나아가지 않았다면 그 민족은 정해진 날에 몰살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어차피 한 번 죽는 목숨이니 한 번 죽기로 각오하면 진정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직 성경대로 믿어야 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3개 항의 종교개혁 모토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만 구원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킹제임스흠정역/로마서 1:16-17)
그 정점에는 언제나 만유의 주재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절대주권이 기독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왜곡되고 변질되더니 이젠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영.혼.육을 사단에게 팔아 넘기는, 돌이킬 수 없는 무저갱의 함정을 파고 들어가는 현상이 펜데믹을 통해 정점을 찍으려는 듯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권을 최선의 가치로 떠받드는 인본주의 풍조가 이렇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깨방정 떨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가 최선이고 하나님은 차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보다 우위에 머무는 형국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정치적으로 통제 당하게 될 것입니다. 통제 사회는 노예 사회를 위해, 노예 사회는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됩니다. 큰 성 바벨론에서 철저하게 계획 되고 준비된 악의 모사입니다. 자본주의의 변질, 스마트폰의 큐알코드와 사생활 침해 및 감시, 구글의 위치추적 및 개인정보 수집 등도 그 일면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배금주의에 빠진 것은 당연합니다. 돈이 전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맘몬의 가치가 상승되니 하나님이 돈 보다 못난 게 됩니다. 돈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한 셈입니다. 그랬는데 최근에는 돈이 인간의 주인이던 자리에서 돈을 제치고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뿌리는 유럽의 문예부흥입니다. 인본주의 운동은 신학중심의 학문 체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추구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르네상스는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사상적 정신적 태도의 세 계관입니다. 이른바 인문주의와, 휴머니즘의 횃불이 그것입니다.
20세기 초의 독일 신인문주의는 <진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최근에 이르러 인권이 최우선의 가치가 되면서 행복추구권이니 차별금지법이니 하는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동성애법 등 하나님이 엄히 심판하시는 죄악을 권리로 포장하여 옹호합니다.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워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한 것을 사람이 죄가 아니라고 선동하며 부추깁니다. 이것이 인권을 제일주의로 여기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경시하는 어리석음임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 그들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사망의 길을 갑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도 죄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라는 게 속 빈 강정에 불과함을 하루가 다르게 실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권제일주의 풍조에 휘말리지 말아야 하며, 무수히 쏟아지는 다양한 사타닉 오컬트(satanic ocult)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기독교의 본질을 사수하기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2>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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