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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6-27 [나는 평안을 되 찾고 싶다]

Adullam 2020. 11. 8. 08:3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6-27>

[나는 평안을 되 찾고 싶다]

나는 아주 아주 작은 교회의 목사다.
2014년 5월부터 지금까지 'SNS 선교사', 'SNS missionary' 라는 아이디를 써가며 여러 장르의 큐티사역을 해오고 있다. 목적은 복음전파다. 다른 목적은 없다. 그런 내게 요즘 평안이 사라졌다.

나는...

1년 8개월 전, 세상적으로 봐도 썩 괜찮은 자리에 후임자로 제안을 받았다.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계속 됐다. 나도 계속 거절했다. 그러나 그 곳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최근 수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내 안의 평안은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 혼이 메말라가는 느낌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말만 해대는 사람과 말을 섞으면 말을 섞는 그 사람이 변명하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져도 이기지 못한다. 왜 그럴까? 자기가 살아온 방식, 자기가 해왔던 방법이 옳다고 철저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 있을때 나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침묵을 선택한다.

사역의 핵심 덕목은 사명감이 강하고 성실해야 하며, 어떤 일이든 사람과 해결하려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기도로 맡겨야 한다. 변함 없는 한결같은 평강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즘 깨닫는 것이 있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은 '감사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펀하다는 것을 느낀다면 '축복이라는 것'이다. 전쟁 같은 삶의 터전에서 일을 하다가 몸이 힘들 때 잠시 쉬면서 차를 마시거나 눕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펀하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곤하고 지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쿠션이 좋은 침대와 전신 자동 안마 의자에 큰 돈을 투자하는 이유도 잠간의 편안함을 위해서일 거다. 사람은 누구라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도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영혼에는 관심이 없다. 즉 평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평안을 무색무취로 취급하는 것은 '평안'을 '편안함'으로 착각하거나 평안이 주는 참 맛, 곧 평안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이 분주하고 마음이 병들어 있어 참으로 피곤하게 산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만의 방식, 자기만의 세세한 방법만이 옳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마저도 평안이 없다는 사실이다.

평안은 주눅들게 하는 생각과 불편한 마음이 전혀 없는 기쁨의 상태를 말한다. 벅차오르는 소망과 영적 환희의 지속성을 말한다. 육으로는 바쁘고 지치고 힘들지만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뿌듯하고, 감사와 감동이 있다. 이것이 평안이다.

평안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래서 평안함이 있는 사명은 기쁨이 동반 되고, 감사와 소망이 넘친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다. 반대로 평안이 없으면 불안하고, 주눅들고, 눈치보고, 짓눌린다. 사명자의 본질을 잃어간다. 그래서 변질된 사역을 행하게 된다.

사람들은 기쁨의 희열을 느낄 때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안정을 취했다 해도 현실은 그 안정을 사정 없이 깨버린다. 그래도 끊임없이 편안함을 찾기 위해 애쓴다. 인간관계를 멀리하거나 차단하기도 하고 전원생활이나 애완동물에게 마음을 쏟기도 한다.

평안은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안은 예수를 믿는 성도면 반드시 누려야할 영혼의 안식이다. 요동치지 않는 영적 안정이 심신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평안'이다.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나 신학교나 총장이나 총회장이나 국가나 세계전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 상황과 정세의 판도가 크게 달라진다. 더우기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무엇인가를 크게 일군 사람은 자신을 전지적 위치에 올려 놓는다. 제왕적으로 군림한다. 아랫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흠과 티를 찾아내 지적한다.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큰 소리로 훈계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나이가 자기 보다 많아도 반말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믿고 맡겨도 이내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질책한다. 그런 그에게 주님 주시는 평안이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본다.

평안이 없으면 화목도 없다. 언제나 차가운 바람이 분다. 싸늘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과연 그 곳에 평안이 있는 것일까? 그 곳이 선지동산 신학교라고해도, 그 곳이 교회라고해도 평안이 없다면 껍데기 형식만 남아 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신학 교육 커리큘럼에 의해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수업, 주보를 빽빽히 메울 정도로 다양한 순서가 들어가 있는 형식에 치우친 예배. 그 곳에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평안이 있는지 조심스레 의심해본다.

나는 평안을 누리고 즐기는 사람이고 싶다. 하나님 은혜에 푹 잠겨 광야 같은 세상의 험한 삶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 곳에서 나오려고 한다. 가난해도 주님의 평안으로 배부르고 싶다. 힘겨워도 주님의 평안으로 노래하고 싶다.

“너에게 평안을 주노라...”

이 말씀의 의미는, <평안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며, 신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단언적 선포>이다. 이 평안이 이 글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