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데살로니가전서 3:7-9)
[좋은 교회, 나쁜 교회]-2/2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18장이 배경입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 때 유럽의 첫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투옥되었던 바울은 그 서쪽 40km 쯤의 데살로니가로 옮겨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폭동을 일으켜 부득불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쪽 80km 쯤의 베뢰아로 야밤 도주 하였습니다.
문제는 데살로니가의 그 폭도들이 베뢰아까지 좇아오는 악랄함에 또 다시 몸을 피해 아덴 곧 현재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로 이동하였다가, 드디어는 발칸반도의 서남쪽 끝머리에 있는 섬 고린도에 머물며 전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악랄한 박해자들의 폭력을 피해 다니는 것도 힘겨운데 경제적으로 궁핍의 상태여서 이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맡아 목회하던 디모데가 찾아와 반가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서 간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기쁨이 넘치는 바울이 뿌듯한 가슴으로 쓴 서신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의 씨앗이 데살로니가에서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실종되고, 대속의 크신 은혜가 실종되면 교리의 도그마(dogma)에 빠집니다. 은혜와 긍휼과 사랑은 사라지고 율법만 횡행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없는 신앙은 은혜 받은 신앙이 아닙니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거듭나지 못한 신앙입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신앙입니다. 기름이 없어 불이 켜지지 않는 등만 들고 밤 길 걷는 모양새와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 된 열 처녀 비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는 말씀에 의하면 등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들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기는 하는데, 그 뿐이면, 거기에 머물면, 불 꺼진 등만 들고 다니는 형국이 아닌가 합니다. 불 꺼진 등, 세상의 빛이 못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명이, 어쩌면 인간의 능력 한계를 추월할 것만 같이 급속히 그리고 고도로 발달하는 현재의 모습에서 제 2의 바벨탑을 보는 듯 한데, 밝음을 의미하는 문명의 빛을 교회의 등불이 압도하지 못하면 이는 곧 세상의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성경 곧 등만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좋은 교회 타령입니다. 교회를 섬기려하지 않으면서, 기도하지 않으면서, 전도하지 않으면서, 십일조 하지 않으면서, 봉사하지 않으면서,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기뻐할 교회를 불 꺼진 등만 들고 다니면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아무리 많은 것을 드린 듯 하나님이 기쁘실 리 없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행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미6:6-8).
겸손하게 하나님께 행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순종입니다. 순종은 경외입니다. 경외와 순종 사이에 등식이 성립됩니다. 성경 들고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여도 그건 신앙생활의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 경외만이 신앙의 충분조건입니다.
경외하면 순종합니다.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도 순종하지 않으면 경외하지 않음입니다. 순종은 등 속의 필수품인 기름에 다름 아닙니다. 믿음으로 준비한 기름, 떨어지지 않게합시다.
할렐루야! <아둘람공동체_✞SNS복음선교사>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https://youtu.be/fLVF1ePNql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