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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감사]

현명인목사 2017. 5. 4. 06:51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목숨 걸고 감사]

 

어린이를 지극히 사랑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집필 중이었던 심야는 개미 발자국 소리가 들릴 만한 적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적막을 깨며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필경 개미의 발자국 소리는 아닐 터, 그 소리는 아니나 다를까 이리저리 바삐 돌아가는 눈알만 빼고 복면한 강도가 침입 하는 소리였습니다. 방정환 선생의 이 일에 얽힌 일화가 유명합니다.

 

강도가 명령합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손 들라면서 꼼짝 말라면 어쩌라는 거요?'

 

다시 명령합니다. '손 들고 꼼짝 마! 그리고 있는 돈 다 내놔!'

 

'꼼짝 말라면서 돈을 어떻게 꺼내겠소?'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 내려서 돈 꺼내!'

 

방정환 선생은 갖고 있던 390원 전액을 건네 주었습니다. 강도가 냉큼 그 돈을 들고 나가려하자 이번엔 방정환 선생이 큰 소리로 야단쳤습니다.

 

'390원이나 주었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도 안 하다니...'

 

강도가 놀라서 어정쩡하게 인사합니다. '가...감사합니다.'

 

390원의 1930년대 화폐가치는 쌀 30가마니, 한 트럭 값입니다. 강도든 절도든 그 횡재에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순경이 그 강도를 데리고 왔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내가 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경은 이 범인이 이미 다 자백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방정환 선생은 '무슨 강도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가겠소? 그 사람 참 딱해 보여서 내가 주었더니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소.' 강도는 억지로 했던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족과 감사는 별개입니다. 만족은 욕구, 욕망, 바램의 충족상태입니다. 하지만 충족 되었다해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바라게 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만족하지 못 합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감사하지 않습니다. 대체 뭘 믿고 그리 무지막지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족상태에서도 감사하지 않는 이것이 무지막지요, 하나님의 뜻인 범사에 감사하지 않는 것이 무지막지며, 배짱 튕겨가며 예수 믿지 않는 게 무지막지입니다.

 

텅 비어도 가능한 게 감사입니다.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그런 수준의 감사를 하나님은 명하셨습니다(합3:17-18).

 

하나님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면, 천국을 소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 할 일이건만, 기독교인라면서 광야 40년의 히브리인들처럼 원망과 불평에 익숙하고 감사에 인색한 경우를 너무 흔히 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감정명령을 하셨을까요?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의아했던 것 중 하나가 감정명령의 발견이었습니다. 행위명령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지만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명령은 부당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에 이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서까지 첨가하였습니다. 강조인 셈입니다.

 

범사란 최선과 최악이라는 양극까지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이대로 한다면 망해도 감사, 실패도 감사, 죽게 되어도 감사, 억울해도 감사, 괴롭고 슬퍼도 감사하라는 게 됩니다. 오직 감사, 그래서 감사 외의 다른 감정이 존재할 수 없는 상태여야 됩니다.

 

사전적 의미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가리키는 <감정>은 사람의 인격이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전에는 심리학에서 감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않았지만 J.워드와 W.분트는 감각은 객관적인 것,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구별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감정은 인식작용이나 충동의지와 다른 것이기에 사실상 엄밀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감정>, 이 감정을 이기기 위해서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면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됩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면 됩니다. 십자가 복음이 내 안에 녹아져 있으면 됩니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면 됩니다. 천국소망이 내 운명 되면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에 미친 예수쟁이요, 복음에 미친 복음바보 되면 감정을 지배하는 주인이 됩니다. 감정의 걸림돌은 없습니다.

 

<순종>, 그것도 절대순종은 두 종류의 사람만 가능합니다. 노예와 바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예~' 하는 바보가 되든가, 전혀 판단 능력이 없어서 하라는 대로 '예~' 하는 바보여야만 온전한 순종이 가능합니다.

 

예수 잘 믿으려면 바보 되는 게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보처럼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고, 백 세에 낳은, 그래서 천하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될 수 없는 외아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임에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상 노아도 바보같은 순종의 대명사입니다. 비의 개념조차 없던 그 시대,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 말 않고 즉시 작업 개시합니다. 이것이 목숨 건 감사의 순종입니다.

 

목숨 걸고 감사하지 않으면 범사에 감사 할 수 없습니다. 즉, 감사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범사에 감사함이 하나님의 뜻이라 함은 감사 해야 할 모든 필요충분 조건이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원망할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목숨 건 감사뿐입니다. 할렐루야!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 SNS복음선교사>

 

※<아둘람복음공동체>의 '영상큐티'를 전도목적과 신앙교육용 큐티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SNS복음선교사 입니다.

(유튜브:아둘람복음공동체, 아둘람큐티콘서트)

 

'감사해 by 클래식콰이어'

https://youtu.be/hEnDxFdN8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