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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성탄절특별큐티 [예수님의 계보와 성탄절의 사랑예찬]

현명인목사 2017. 12. 25. 00:22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2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2017. 성탄절특별큐티

[예수님의 계보와 성탄절의 사랑예찬]

 

성탄절,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이야기는 동화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제국이 현지인 총독으로 세운 헤롯 대왕과 면담한 기록, 예수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의 영아학살명령, 인구조사령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에 관한 일련의 성탄 관련 기록들은(눅1장, 마2장),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된 그대로 하나님이 연출하신 장엄하고 복된 <메시야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계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계보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행적 방식이면서, 첫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28대손인 예수님에게서 끝이납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와 마리아 등 다섯 여인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점입니다. 마태가 조금 짓궂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3장의 계보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행적 방식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계보의 정점이 아브라함과 아담을 넘어 하나님까지 올라간 점,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대체로 일치하지만 마태복음의 계보에 없는 낯선 이름들이 누가복음 계보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 낯설지 않은데 누가복음의 다윗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에는 전혀 낮선 이름들이 나옵니다. 마태가 언급한 다섯 여인의 이름이 누가복음에는 없다는 점도 다릅니다.

 

짧은 지면에 상세한 설명은 어려우므로 간략하게 해석 한다면, 누가복음 3장 계보 도입부의 ‘사람들이 아는 대로’라는 단서가 주목할만합니다. 마태의 계보가 구약의 기록을 근거로 하였다면, 누가의 계보는 다분히 상식에 근거한 측면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더 나아가 누가가 예수님의 계보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혈통을 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계보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속을 성취하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마2:23).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므로 임마누엘은 곧 사랑입니다.

 

날이 갈 수록 부모 있는 고아가 늘고 있습니다. 내가 어릴적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베이비 박스가 있습니다. 아기를 거기에 놓아둔채 눈물을 훔치며 돌아섭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차마 말 못할 여러 사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미혼모의 경우는 그럴만도 하다지만, 자식을 버리는 비정은 천륜을 범함이라 대개 분개합니다.

 

그렇다면 그들만 비정할까요? 그들을 규탄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더 비정하지 않을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삶에서 드러나는 일상적인 비정은 아예 비정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더 차가운 비정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상대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혼한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데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덜어내기 위해 어린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는 비정을 비난하면서, 일상적으로 저질러지는 나의 비정을 비정으로 느끼지 못함은 그야말로 비극적인 비정입니다.

 

몇 가지 예로, 가난의 고통과 비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가난하게 사느냐고 비난조로 말한다면, 고학력자가 저학력자에게 당신은 대학 졸업장도 없냐고 조롱하듯 묻는다면, 사지가 온전한 사람이 장애를 가진 자에게 당신은 왜 몸이 그런가 하고 멸시하듯 묻는다면, 그것은 틀림 없는 자식 버린 엄마 못지 않은 비정입니다.

 

신앙적으로도 그러한 예는 허다합니다. 권사인 당신의 남편은 왜 알콜 중독자인가? 목사의 아들은 왜 감옥에 가는가? 장로의 딸은 서른 처녀의 몸으로 왜 두 딸을 가진 40대 이혼남과 결혼하였는가? 당신 아들은 명문대를 나온 수재라면서 왜 취직도 못하고 빈둥거리는가? 다 옳은 말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물는 것 자체가 비정입니다. 나와 다른 그가 이해되지 않아 비난하듯 물으면 그것은 비정입니다.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면 비정이고, 그 아픔을 비난하면 비정입니다.

 

이해와 용서와 긍휼과 연민과 동정과 자비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나 보다 못한 자들을 보면, 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보면, 성탄하신 예수님의 자리에 산타클로스를 앉히는 자들을 보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지 못 하는 자들을 보면, 하나님의 연민으로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되는데 오히려 멸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일상 다반사입니다.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에서 긍휼이 나옵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제 아무리 존귀하고 높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은혜를 거부하면 그 사람보다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가 제 아무리 잘났어도 루터가 말했던 '존재론적 영의 우울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거리에서 흔들리는 가로수 나뭇잎만 봐도 창조주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솜씨를 찬양합니다. 존재론적 영의 우울감은 <영적 환희를 노래하는 창조의 원형>으로 변화됩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 이름을 존귀하게 드높이는 기쁘고 거룩한 날입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또 외칩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할렐루야!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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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기쁘다 구주 오셨네(찬 115)

파이디온 찬양드림_Joy To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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