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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5 [복음(福音) :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1

Adullam 2022. 9. 6. 11:1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복음(福音) :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1

“선한 명철은 은총을 베푸나 범죄자들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죄를 범하는 자들의 삶이 어떤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험하다'는 말은 '평탄하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평탄하지 않다'는 말은 '거칠고 굴곡이 심하다'는 말로 대체 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굴곡이 심하다'는 말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반복 된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상황이 수시로 발생 된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상황이 반복 되면 눈물과 한숨 섞인 일상으로 인해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만족감 없는 불행, 그것은 인생을 어둠에 짓눌리게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겠지만 악을 행함과 동시에 참 된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괴로움과 근심을 안고 코 끝의 호흡을 이어나갑니다. 훔친 사과가 맛있다는 말의 의미와 같이, 악을 행하는 순간의 짜릿함은 있을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찰나일 뿐입니다. 죄를 범함으로 얻을 수 있는 자족함은 결국 마이너스로 점철 될 뿐입니다.

욕망의 제단을 쌓는 일도 죄입니다. 욕망의 제단을 바라만 보는 것도 죄입니다. 욕망의 제단은 스스로 파놓은 무저갱과 같습니다. 무저갱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도 끝이 없습니다. 늘 불만족이기 때문에 불평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살지 않으려면 만족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만물을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탐욕은 무질서와 혼란이 뒤 범벅 된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어지러움 가운데 안식이 없고, 요동치는 가운데 평강이 없습니다. 죄에 거하며 악행과 더불어 목숨을 연명해 나가는 악인들은 그래서 빛의 자녀들이 누리는 평강을 얻지 못 합니다. 빛이 아닌 어둠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어둠 자체로써의 어둠이 아니라, 빛의 부재가 어둠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이 없는 곳은 모든 곳이 어둠일 뿐입니다. 불만족은 불만족 그 자체로써의 불만족이 아니라 만족감 없음이 불만족입니다. 그래서 만족감을 주시는 주님이 없는 곳에는 불만족으로 인한 불평과 시기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곳엔 탐욕이 솟구칩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죄는 만족함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을 낳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악행은 신앙적 가책을 낳고,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의 범행은 양심의 가책을 낳습니다. 그 가책을 없애려고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이전의 죄를 덮어버립니다. 가책에 가책이 더하여져 비참해지기 시작하고, 결국 패배감과 허무함에 짓눌려 상실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 합니다.

죄는 상실을 낳습니다. 정직함과 순결함과 순수함이 상실되고, 꿈을 꾸며 살던 이상적인 모습이 상실되고, 고결함이 상실됩니다. 결국 죄는 한 인간을 무너뜨리고 인격의 분열을 가져와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는 불행을 낳기에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불행이 가져온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쾌락에 빠지고,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자꾸 채워 넣으며,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딤후 4:3-4).

이것은 삶에 대한 도피현상의 일면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인간을 현실도피주의자로 전락시킵니다. 현실도피는 의식적인 삶에 대한 회피이기 때문에 아군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의식적인 삶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표적인 현실도피의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상상입니다. 상상은 의식적 사고가 아닙니다. 사고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착각일 뿐입니다. 생각 속에 숨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사고 능력은 문제해결을 돕고 목표를 이루게 돕습니다. 하지만 상상은 아무런 행동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둘째, 감정입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을 마치 자기다움으로 착각합니다. 물론 그 감정을 통해 내면의 욕구를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그 감정에 깊이 치우치게 되면 의식이 있는 현실적인 선택을 놓치게 됩니다.

셋째, 자극입니다. 내면을 직시하지 않고 외부 자극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기심, 새로운 경험, 오감의 자극 등에 시선을 집중시켜 올바른 사고에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일상의 다이나믹한 변화가 없는 고요함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입니다.

상상, 감정, 자극을 좇으면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벗어나게 됩니다. 현실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이상을 쫒게 되고, 이상에 치우치면 자신을 직시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현실도피는 복음으로부터의 도피와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현실 어느 것에서도 도피하지 않으며, 도피하게도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이미지출처: STONE of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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