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복음(福音) : 인생의 지침서]-1
기독교는 낮아짐과 배려라는 황금률이 있지만, 낮아진다고 해서 결코 나약해지지 않는, 낮아지지만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타종교를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폭력과 복수가 아닙니다. 도리어 상대방의 폭력과 복수로 인해 야기된 고난과 박해와 순교를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거센 외적 압박이 가해져도 그리스도인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충분히 영위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합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썩어진 우상 종교문화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복음의 길을 걸어 가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애매모호한 이상주의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주장 등, 기독교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등의, 그릇된 여러 유사진리와 비진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피하려고 하고 부딪치지 않으려고해도 이러한 것들을 맞딱드리게 되는 것은 세상에 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기독교는 죄에 대한 용서를 베푸는 일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종교다' 하는 주장도 있고,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화해를 요청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는 종교다'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것도 같지만 이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된 신앙관에서 비롯된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유사진리들이 각양각색 다양한 방법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에 흥미를 느끼고 호응하면서 교회 다니는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되먹지 못한 쓰레기 견해들이 계절에 옷 바뀌듯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사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그릇된 기독교관에 빠져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회개’와 ‘죄사함’과 ‘생명’이라는 총체적인 복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올바른 신앙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 자리에서 머물고 있는 믿음이 아닌, 앞으로 정진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복음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믿음이 아닌,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들에 핀 풀과 꽃과 같이 시들고 떨어지는 한시적 생애만을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사로써의 믿음이 아닌 동사로써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또한 참 된 믿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식하고 존중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빠져버린 믿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귀신들의 믿음과 다를바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돌이켜보는 일을 우선해야만 가능합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한 회개는 믿음 안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개 이전의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용서부터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로 죄 씻음 받아 정결함을 입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청종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주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해줍니다. 즉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인생, 곧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인간의 언행심사는 달라집니다.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living)이고, 또 하나는 붙어 있는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existing)입니다.
요즘은 의학기술이 워낙 발달 되어 생명의 연장을 돕기도 합니다. 사람 몸속에 있는 내장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하면 죽게 되지만 이것들을 돕는 기계들과 연결하여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그 기계의 전원이 차단되기 전까지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붙어 있는 목숨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이 때 까지는 의사로부터 사망 확인 진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곧 멈추어질 코 끝의 호흡은 세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죽음과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곡간에 쌓아둔 것들로 풍성히 먹고 마시고 즐기고 쉬며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위로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눅 12:16-21). 이것이 성경을 모르는 자들의 종말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모든 자들의 결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준선으로 자신을 돌이켜봐야 합니다. 성경은 지나온 삶을 보게 해주고, 나아갈 삶을 예측하게 해주며, 육의 죽음 너머의 상황을 미리 보게까지 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교과서이자, 천국의 앨범입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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