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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26, 시편 37:5-6 [복음(福音) : 하나님을 의지하라]-1

Adullam 2022. 7. 26. 10:07

[잠언 3:26]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시편 37:5-6]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복음(福音) : 하나님을 의지하라]-1

연약한 인간은 사욕에 휩쓸려 넘어집니다. 사단이 사방에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틈이 보이면 파고들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 맘몬의 떡에 중독 되게 합니다. 중독 되면 마치 스펀지처럼 세상 것을 빨아들이게 되고, 두부처럼 흔들거리고 짓눌려지게 되며, 종이처럼 쉽게 찢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정욕과 탐욕과 사욕 앞에 무너지는,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위 너구리' 또는 '바위 오소리' 라고도 불리우는 '사반'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사반은 바위가 있는 곳을 서직지로 삼습니다. 바위 지역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벼랑의 틈새를 주거처로 삼습니다. 시편 104편 18절에도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권위있는 다른 서적들에도 시리아의 '바위 히락스'(rock hyrax)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히락스는 너구리입니다.

'바위 너구리'는 굽이 갈라지지 않았고 턱을 비스듬히 움직이고 새김질을 하며(레 11:5, 신 14:7)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발은 바위를 뛰어 다니기에 이상적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몸집은 토끼만하지만 해부학 구조로는 토끼와 전혀 다릅니다.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코끼리와 비슷한 종에 속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갈릴리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사반은 살 수 없을 것 같은 벼랑 바위 부근을 견고한 방어막으로 삼습니다. 이토록 가파른 벼랑 바위라는 견고한 철옹성을 의지하기에, 그 보다 강한 짐승들이 가까이가지 못 합니다. 싸울만한 힘도,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도 없지만 그 험한 야생에서 당당히 번식을 이루며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을 의지해야 자기가 안전한지를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한 장은 약한 힘을 가해도 쉽게 뚫어지고 찢어집니다. 그러나 단단한 벽에 붙은 종이를 뚫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손가락이 부러집니다. 사반은 종이와 같은 존재이지만 벼랑 바위를 의지하는 지혜로 승리를 이룹니다. 사반의 이러한 '적응력과 기지'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와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 인간은 더 나약합니다. 그래서 쉽게 뚤리고 찢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시요, 완전한 요새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높고 단단한 벼랑의 바위를 의지하는 사반의 지혜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온전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며,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복종 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이 우리를 온전하게 할 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됩니다.

[고후 10:4-6]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누군가 거의 모든 것에 강하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스펙으로 가득 차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자랑으로 삼는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의 자랑이 교만을 대변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의지합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형이상학적이든 형이하학적이든, 의지하는 무엇인가가 있긴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배경을 의지하거나,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 등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의 머리를 의지하고, 주먹을 의지한다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학벌을 의지하고, 인맥을 의지합니다. 재물도 의지하고 가진 권력과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의지하거나 말주변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또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태어난 것을 의지하고, 그 나라에 사는 것을 의지합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구원에 대하여 모태신앙인 것을 의지하고‚ 기독교 집안인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세례 받았다는 것을 의지하기도 하고, 그래도 한 때는 교회에서 봉사도 좀 했었다는 경험을 자랑 삼아 의지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는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등록교인이라는 것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것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1차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입니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른다'는 말씀은 “의로운 행위로 말지암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긍휼하심 따라 말미암게 된다.”는 두 개의 문장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그러나’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다소의 사울은 자신의 의에 빠져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바울로 변화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절망에 빠진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됨으로 강력한 개신교의 발판을 마련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웨슬리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절망의 내리막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작은 모임에서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는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필자는 사욕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이생의 자랑에 취해 살아왔습니다. 결국 추구하던 것들 속에 감춰져 있던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15절 말씀 앞에 무릎 끓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 때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나의 눈을 바라보시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고, 베드로의 고백은 필자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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