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복음(福音) :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결단(決斷)]-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강권합니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는 그 믿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에는 ‘고결함’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 고결함은 ‘정결함’이고 ‘순결함’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믿음 아래에 두는 ‘절대자를 향한 소망이자 가치’입니다. 여기에 바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기독교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내가 연약할수록 도드라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인류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삶의 방법'이고, '참 된 승리'이며, '영원히 누리는 기쁨'이자,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근원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관건은 그 분의 절대적인 권능을 신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문제는 자아 의식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주님 대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전심으로 갈구하는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커다란 믿음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도전은 영적으로 민감해야만 받게 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받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담대해야만 받게 됩니다.
디모데는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서신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요동치지 않았으며, 의기소침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에 대한, 행위로 나타낸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으로 직결된 온갖 위협 등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해준 사도 바울의 답변을 고찰하면서 자기 자신의 주의를 환기 시킴과 동시에, 신앙 생활을 점검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름 신앙생활 좀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상은 어떠한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병에 걸리고, 재산을 잃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할때,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거나 또 다른 어떤 큰 슬픔에 잠길 때 나는어떻게 대처하는가?
미래에 대한 나의 대처는 무엇인가?
이런 항목들은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문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위의 모든 상황에 접하게 될 때 과연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이 대처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성경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권면과 조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곧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에 관한 정답이 성경 66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단단히 품고 살아갑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문제, 지구촌의 분쟁과 난민에 관한 문제, 번영과 성공에 관한 문제 등, 몇몇 주제들에 관한 특정 입장을 고수하는 게 종교집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과 종교 자체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자들의 궤변일 뿐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상의 것들을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변질된 복음을 내세운 카톨릭의 메시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한 기도,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 선행에 의한 구원, 등 변질된 내용들은 다양합니다.
각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를 왜곡하는 무리들이 존재했습니다. 현재도 그러하며 마지막 그 날이 이르는 순간까지도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완악함과 패역함을 잔뜩 품고 있었던 각 시대는 성경의 교리와 신학의 정의들을 꺼려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뒤 섞여 버린 모호하고 애매한 영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을 상기시키는 다음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복음의 기초가 필요합니다. 혼란하고 혼탁한 시대일수록 근본 원리로 돌아가 이를 상기해야 합니다.
이 세대는 포스트밀레니얼(postmillennial) 세대로 가득합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마저도 파악하지 못하고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저 모든 것을 손바닥 위의 작은 디바이스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 디바이스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등, 잘 못 사용하게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면 전도의 도구로써 실천신학의 총체적 적용범위 안에 든 하나의 전도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신학을 총체적으로 적용하는 실천신학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선교교육이나 선교신학입니다. 따라서 모든 과목이 선교신학이나 선교교육의 주요 과목이 됩니다. 그러나 대개 학교나, 선교 단체나, 교회가 중점적으로 취급하는 과목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쉬(David Bosch)의 표현처럼 “선교는 교회의 단순한 부분적인 기능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활동 기능이 다 선교교육의 영역에 속합니다.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 등 교회의 모든 기능이 모두 선교 활동을 위한 교육적 기능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동일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듯 한 거대한 인류의 흐름은 실제로는 제각각입니다. 화합도 없고, 연합도 없다. 마치 과거의 실용주의와 공리주의로 가득한 느낌입니다. 기독교에 침범하는 그 사상들이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더더욱 근본 원리로 돌아가 화합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그 원리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결단이고, 모든 신학을 총체적으로 적용하는 실천신학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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