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복음(福音) : 복음과 패권사(覇權史)]-2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스스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다만 모태를 통해 갓 난 아기의 모습을 한 채 수동적으로 태어날 뿐입니다. 우상 종교에 빠진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 대상을 스스로 있는 신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다만 사람이 깍고 다듬어 만든 수동적인 신의 형상으로 나타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무가치한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디모데후서 1장10절은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드러내심은 명백하게 나타나시고 나타내신 신(神)의 현현(顯現)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놀라우신 목적과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딤후 1: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마음 안에 영원 전부터 있었던 그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써 우리 앞에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일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기대하는 자에게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자들에 향하여는, “너희가 이렇게 하였으나 뱀의 후손과 너희의 후손이 영원히 원수가 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악과, 마귀와, 지옥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는 신약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부터 세상을 향한 자기의 뜻과 계획을 여자(동정녀)에게 갖고 계셨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주는 위로함과 위안은 낯설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 몸 안에 두 본성을 지니신 완전하신 인간이십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어 나타나신 사랑입니다. 그 분 곧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체포 되어 주셨고, 유죄 판결을 받아 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해 주셨습니다. 온갖 대적 자들의 야유와 비아냥거림 속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곧 기독교의 중심 교리입니다.
예수를 죽인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신을 내려 무덤에 넣었고 큰 돌을 세워 봉인한 뒤 병사들로 하여금 그 무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되는, 때가 찬 언약 성취의 실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깨우침을 위한 권면을 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복음을 통해 생명과 썩지 않는 불멸의 삶을 드러낸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생명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진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이는 죄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고, 인간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반드시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본능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없어도 모든 사람은,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이 율법(고전 15:55)임을 예감합니다. 그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가 되면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혹자는 빠르게, 혹자는 늙어서, 혹자는 죽음에 직면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속에서 이를 메꾸어 줄 무엇인가를 찾아 헤멥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으로 생명의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들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이라는 점을 직시하게 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 스스로는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습니다. 피조물로 태어나 피조물로 죽게 되는 나약한 피조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견고히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향한 믿음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받아들이며 주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출생은 죽음을 향해 가는 첫 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 맥 없이 눞게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정복하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음 앞에서 웃었던 자들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살아서도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하여 사망을 맞이하게 되었던 존재적 죄인인 피조물의 신분에서, 제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옮겨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죄의 전가를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어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의 특권을 갖게 된 그들은 출생과 인생과 사람과 사망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아담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죽음 앞에서 맥없이 쓰러져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가 새 생명의 소망을 갖게 하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킹제임스흠정역 딤후1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리고 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5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또 다른 영역에서의 썩지 않는 또 다른 삶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 세계를 앨범 열어 보듯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복음의 여행자가 된 우리가 보는 그 앨범이 천국의 앨범이고, 그 앨범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현세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죽을 위기에 처해 있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므로 죽는 것 또한 유익하다”(빌 1:21)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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