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복음(福音) : 진리를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3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성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직접 해 먹이고 싶은 마음에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도 하고, 음식물 찌꺼기들과 쓰레기들까지도 손수 다 치웁니다. 돈을 받아가면서 해도 쉽지 않은 일을 자진해서 합니다. 또 밖에서 사계절 날씨를 아랑곳 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부여 받은 봉사를 헌신적으로 합니다. 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을 다 할까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에 순복하는 마음 때문이고, 복음의 근본을 아는 지식 때문이고, 인간의 존재와, 인생과, 세상이 무엇인지를 그래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4.26-1616.4.23)는 그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의 2막 7장에서 극 중 제이퀴즈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음의 7단계로 구분 했습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동안 다양한 역을 하게 된다. 그 역은 7막이다.>
첫째 장, 아기 장면, 유모의 팔에 안겨 울며 침을 흘린다.
둘째 장, 징징대며 우는 얼굴, 가방을 메고 아침에 세수해서 반짝이는 얼굴, 또 달팽이처럼 억지로 학교에 기어 들어간다.
셋째 장, 애인, 용광로처럼 한숨지으며 연인의 눈썹을 찬미하여 바치는 슬픈 노래를 짓는다(중략).
마지막 장, 이상하고 파란 많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제2의 소년기, 그 때는 망각만이 있을 뿐, 이빨도, 시력도, 입맛도 없으며, 사는 것도 덧없기만 하다.
과연 인생의 종지부를 이렇게 찍게 될까요? 모든 인생의 결과가 다 이렇게 되고, 만사의 결과가 다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결국은 무로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셰익스피어의 이 시(詩)가 만일 진리라면,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같은 내용을 진리라고 여긴다면 인류는 ‘혼란’이라는 결과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사색과 이성에 기초한 인간의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우연설’입니다. 하지만 이 우연설은 궁극적 기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연설은 두 행성의 충돌로 우주의 탄생을 말합니다. 하지만 두 행성의 기원은 말하지 못합니다. 최초의 가스에서 비롯된 행성을 말할 때 그 가스의 기원은 말하지 못합니다. 나사에서 말하는 둥근 지구가 사실인지 아닌지 조차도 불분명합니다.
태양계가 과연 존재할까요? 원으로 되어 있는 평평한 지면 위에 태양과 달이 도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야만 여호수아의 전쟁에서 해와 달이 멈춘 것이,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 것이 해석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력은 존재할까요? 혹시 중력이 아니라 밀도의 차이는 아닐까요?
과학에서 주장하듯 우주의 진공이 100%라면 사람이 만들어낸 그 무엇도 100%의 진공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100%의 진공 상태에서 빛은 투과 할 수 있을까요? 투과 하지 못합니다. 지구가 이렇게 환하다면 왜 우주는 어두울까요? 과학은 이것을 답변 하지 못합니다. 답을 내놓으면 과학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앞 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질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필자는 이들의 의견에 일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 있어 보인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복음의 완벽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계절의 순환과 규칙이 있습니다. 산과 바다와 땅과 하늘의 비율과 대칭이 완벽하며, 컬러의 조화와 패턴이 이상적입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완벽함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는 완벽한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도 이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만드셨습니다. 민감하고 정교하고 섬세한 눈입니다.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첨단 과학이 있어도 사람의 눈을 만들지 못합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지 못합니다. 길가에 핀 풀도 못 만들고, 하루살이 한 마리도 만들지 못 합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은 절대로 무엇인가를 창조 할 수 없습니다. 조합하여 발명하고, 파헤쳐 발견할 뿐입니다.
만물에서 일어나는 맹목적 힘이 있습니다. 화재가 나고,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나고, 눈사태가 납니다. 비바람을 동반한 강한 태풍이 있습니다. 이 맹목적인 힘들이 인간 세상에 초래하는 결과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초등학문 수준의 발언에 불과합니다. 성경과 무관한 그들은 말 그대로 비성경적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사로잡힌바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의도’라 대답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답변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은 비성경적인가, 성경적인가?, 나는 사색과 이성에 기초한 인간의 이론에 목숨을 거는가, 복음에 죽고 사는 실제적 복음으로 사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도의 성도 된 단초가 복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 안에 사는 성경적인 삶입니다.
※ 주의 종은 거역하는 자에 대해서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회개함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진리로 교훈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의 사역에는 겸손과 인내와 사랑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 한 필자의 모습에서 곤고함을 느낍니다.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죄인의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만 같습니다.
종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책망하시면서도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심같이 사랑으로 거역하는 자를 치리하여 진리의 길로 돌이키게 해야합니다. 이것이 종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해야 합니다. 또한 거짓 교훈과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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