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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 [복음 :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3

Adullam 2022. 3. 25. 07:2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복음 :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3

사람은 학교, 책, 경험, 사람 등을 통해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들을 개인 간은 물론이고, 단체나 조직사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입니다. 단순히 말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생계를 위하거나, 괜찮은 대우를 받기 위하거나, 인정 받기 위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 이유들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표출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검증을 받습니다. 좁게는 무리나 조직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차원일 수도 있고, 특장점을 찾아 내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확인하고 검증할까요?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검증하는 자나 검증 받는 자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완전한 평가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적, 환경적 요인에 따라 그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절대 평가를 위한 기준이란게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심판 기준만 완전하고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오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 등이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또 얼마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을 대변하기에 적절한가,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있는가,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는가 등을 따지고 계산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것들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서점에만 가더라도 마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듯한 책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놓고 봤을 때, 이 단어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서 같은 소재(素材), 다른 주제(主題)로 쓰여진 책들을 허다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홍수 속에 마실 물 없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복음,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은 능력 그 자체 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가히 표현 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출현한 이론에 불과한 것이거나 사람의 생각에서 튀어나온 어록 수준 따위가 아닙니다. 복음은 복음 그 자체로써 힘과 능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승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복음은 진리의 말씀을 갈망하는 자들을 이끌어 가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능력은 복음을 주장하는 이유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또 다시 선포하게 됩니다.

유일무이한 생명의 단일 복음은 세상의 고학문이라 하는 것들과 엮이기를 거부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 숭배 종교들과 한데 거론 되는 것을 역겨워 합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거룩하고 위대한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결여된 기독교, 이러한 외침이 말라버린 교회는 차라리 기독교의 이름을 떼어내 버려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흉내 따위나 내는 사역은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천하 중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구원도 오직 한 길 뿐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이고,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모든 상황을 실제로 직면케 해주는 진리의 가르침도 그래서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체험이라는 형식을 빌어, 처지가 비참하게 되어 낙담하고 있는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딤후 1:13-14)“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릅니다. 출신 성분도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릅니다. 자라난 환경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배운 것과 배우고 있는 것도 다릅니다. 기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사상과 가치의 기준도 다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가 날 때부터 서로의 다름을 각 지체로써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기질에 상관 없이, 출신 성분에 관계 없이, 잘 나고 못 남에 관계 없이, 각각의 모든 다름과 상관 없이 믿음에 따라 역사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믿음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안에 있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권면처럼, 우리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탁하신 아름다운 복음을 믿음으로 지켜내야 합니다.

지켜내고 있는 복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령에 따라 전해야 합니다. 삶의 실제가 되는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아름다운 복음을 지켜내며 하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교리에서 머물게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적인 복음이 되도록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구체화 시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 목적과 가르침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해야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하는 주기도문이 이를 증거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성도들을 하늘로 옮기시기 전에 먼저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상 과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실천적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블룸하르트'는 이에 대해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땅은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되, 하나님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몰트만'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임박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지금 이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하는 실재와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올인 해야 합니다.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