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으로 가는 좁은길, 멸망으로 가는 넓은길]-3
► 자기 부인의 여부를 놓고 종교학에서는 고등 종교와 하등 종교로 구분합니다. 고등 종교에 속한다는 회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탐구하고 영원한 가지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 부인을 위한 무서운 고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불교도 무아지경에서 보살이 되기 위해서 평생 면벽수양(面壁修養)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불교 역시 고등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떨까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가 강하면 올바른 신앙 생활은 불가능 합니다. 자기 부인의 동반은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과정은 일생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협착하고 좁은 길을 걷는 총체적인 성화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종교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기독교는 정점을 찍는 최 상위 고등 종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학문적인 분류일 뿐,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고등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1)관련 종교의 성직자 수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티베트의 라마 불교가 타락했을 때, 그 나라 남성들의 70%가 승려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똑똑한 젊은이들 거의 모두가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은 (2)급증하는 성직자들을 위한 종교 기관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3)마지막으로, 기복 신앙이 중심적인 메시지로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 받으며 잘 사는 것이 그 종교의 본래 목적처럼 변질되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한국만큼 신학생들이 많은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세계 신학생들을 다 모은 숫자보다 많지 않을까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에 있는 신학교들 다수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한국 유학생들과 이민 2세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신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졌을까요? 목회를 하면 먹고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남에게 대접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말 거룩한 부르심의 소명 때문일까요.
수십 년 전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삶은 가난했습니다. 세상적으로도 전혀 대우 받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 갖다 주는 성미가 떨어지면 그저 굶기 일쑤였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서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만약 이 시대의 한국 교회 목사들이 수십년 전의 선배 목사님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많은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가게 될까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를 개척하여 어려운 재정 속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사실 저희 아둘람복음공동체도 매우 열악합니다. 재정 문제로, 아니, 생계 문제로 많이 어렵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 길이 진리이기에 나아갑니다.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 와 좁은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질문, 둘째는,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습니까?' 입니다. 없다면 넓은 길에 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자기 부인의 값을 치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윌리엄 바클리가 말한대로 항상 어떤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대속의 십자가 사랑이자, 부활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 관계를 예로 드셨습니다.
(마 10:36-37)"사람의 원수들이 그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한 가족 모두가 불신자거나 모두 믿는자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은 한 가족 안에 짐승의 편에 선 불신자들과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좁은 길을 가기 위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때, 과연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골육지친의 정을 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주님 가신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서 인류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가족이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악의 카르텔을 따라 생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분별은 생명과 멸망이라는 결론으로 그 정점을 찍게 됩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짐승의 편에 선 자들은 넓은 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이 주는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를 신뢰하고 동조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생각하지 않고 던져주는 보도내용의 먹이를 덥석 물기만 합니다. 생각이 상실되어 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자들은 그들에게는 감당하지 못 하는 자들이 되어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성경의 창을 열고 세상의 봅니다.
이제 곧 "사람의 원수들이 그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씀과 같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고 원수가 되는 상황'이 곧 도래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예화의 말씀은 마지막 시대에 있을 현상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계속>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