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모든 염려를 버리고 주님을 기대하라]-1
내일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불안감 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연금도 들고, 노후대책 마련 저축도 하고, 적금도 들고, 돈 되겠다 하는 것들에 투자도 합니다. 물론 염려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저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 염려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삶의 기본적인 염려입니다. 이 영려가 우리를 폭군처럼 괴롭힙니다.
먹고 살기들 힘들다고 합니다. 더더군다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더욱 증폭 되고 있고, 인플레 현상 대비 물가 체감은 더욱 증대 되고 있습니다. 가계 수입은 제자리지만 가계 부채는 올라가고 있고, 시장 경계도 이에 발맞춰 삐거거리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 가는 게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자녀 한 명 교육 시키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월세를 밀리는 비율도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 전반이 녹슬어가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삶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들이 많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을 위협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괴감이 몰려오고, 그 자괴감 때문에 자존감은 떨어지고, 떨어진 자존감 때문에 대외 기피증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서 우울증을 앓고, 나아가 정신분열증까지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심할 경우, 자기 자신에게 살인을 저지르는 ‘자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이런 염려로 매일 같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문제가 가장 커 보이고, 우리 가족의 문제가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생각을 하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의 연수가 다 되어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질병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죽거나 일 평생 중환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이러한 일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한 예로, 백신 피해 가족들의 울부짖는 사연을 보면, 너무 애처로워 끝까지 보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염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외 줄을 타는 것처럼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또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늘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삶의 무게라고 합니다.
삶의 무게는 염려에서 옵니다. 염려 없이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한 평생을 살았던 솔로몬도,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평생 근심하면서 수고하다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살아가는 인간의 참 모습이자. 인간 됨의 실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니 염려 없이 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음 좋다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자 바울 역시도 염려를 하게 됩니다.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제자가 자신이 수감되어 있는 로마 감옥을 방문했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사도바울은 근심이 컸습니다. 훗날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쾌되자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고쳐 주심으로 인하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도다.” 하는 말로 근심 많았던 자신의 심경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대범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목사라도, 아무리 파워 긍정의 성격을 갖고 있어도, 사람은 근심과 염려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어진바 된 피조물이기 때문이요, 앞 일을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이 말씀에 고개는 끄덕여 지더라도 마음으로까지 공감 되는 분들은 몇 안 될 것입니다. 아무 염려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살아오는 동안의 산 경험이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염려’그 자체에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더욱이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순기능의 도구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