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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9-1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3

Adullam 2021. 12. 23. 06:17

(마태복음 6:9-15)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3

► 다음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번영을 추구하는 맘몬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도 만족스럽지 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단 하루만 먹고 마시기에 적당한 양’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거둔 만나로 그 날 하루만을 먹은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그 날 하루 먹을 양식의 만나만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해 줄 때에도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앉으나 서나 복을 받고, 자나 깨나 복을 받기를 원하는 기도"에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주시고, 떡 반죽에 복을 주시되 차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해야만 기도 받는 상대가 '크게 아멘'하고, 그래야만 잘 한 기도라고 생각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가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그의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혼을 깨우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영의 눈과 귀가 바르게 열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기에 그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과 참 믿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군중의 분위기를 살펴가며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도 받는 자의 마음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부풀게 하는 기도도 옳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인본주의적인 기도이며, 맘몬 아래에 있는 번영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예배에 들어간 하나의 순서 목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다음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를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즉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 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죄와 벌, 죄와 용서에 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문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자, '참된 회개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4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서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이 이 말씀에서도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는 ‘죄와 용서’에 관한 매우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해 주시고 나면 아예 다 잊으시고 도말해 버리십니다. 용서해 주신 죄는 다시 꺼내어 사람처럼, “너 그때 그랬지?” 하고 되묻지 않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다는 표현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죄에 대해서 만큼은 용서를 구한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시고 그 죄를 다 잊어주십니다. 그래서 죄인 된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이 되어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이웃간, 친구간, 형제자매간, 심지어는 가족간의 죄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계산적이기 때문이고, 못 되먹은 교만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영.혼.육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감히 단정지어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이 기도문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 다음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셨고, 우리 역시도 거의 매일 시험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보통 시험을 당할 때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는데, 시험에 대적하여 악과 유혹을 이기거나, 또는 그것에 굴복하여 악에 빠져버리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 등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시험을 미끼로 던진 사단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의 '시험'(temptation)은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합니다(막 14:38, 갈 6:1). 이것은 ‘사단에 의해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는 견해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인 환난에서의 배교(aposttacy)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뉘어집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험'이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후자의 배교라고 단정 짓는 견해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13절에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 여러 곳에는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도 있습니다(고전 10:13, 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은 마귀의 시험인 T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 되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시려는 Testing에 해당 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또한 날마다 사단의 미혹에 노출 되어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에 이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다만’은, 그 이전의 기도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이어지는, '악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승리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다음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입니다.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에는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누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기도 끝에 반드시 송영(=영광송 Doxology)을 뒤따르게 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했다'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봤을 때도 본문의 송영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고 믿고, (2)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신다고 믿고, (3)성령 하나님의 내주(內住) 교통하심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믿는 성도라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국입니다(10절). 그리고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키시는 것은(12절) ’권세‘ 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것이 '영광'입니다(9절). 그래서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의 원칙을 제대로 배워서, 바르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2.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역천자가 세상의 온 지면 위에 득실거려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3.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온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4. 생각 없이 중얼거리고 규격에 짜여진 것을 반복하는 얄팍한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과장되고 조작된 펜데믹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사라져가고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뇌는 점차 세뇌 당하여 생각도 하지 못하는 로봇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온갖 종류의 음란은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번지고 있고, 세상 각 나라의 정부는 돈 앞에 굴복 되어 악의 카르텔을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출현 될 것이고, 악의 카르텔인 큰 성 바벨론을 하나의 정치 시스템으로 묶어, 평화를 명분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사단에게 갖다 바칠 것입니다.

이 때 여러분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짐승의 편에 설 것인가?, 성령으로 인침 받은 아버지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짐승의 편에 서면 세상이 말하는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넓은 길로 다니며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지옥 불 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면 비록 세상에서는 이것 저것 남들이 다 하는 것,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디 가고 싶은데도 못 가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는 것들과 사회보장서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여러 가지 말도 안되는 불이익을 받으며 소위, 좁은길을 험난하게 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렇지만 그 끝은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원히 찬양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짧아도 유익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안이 될 수 없고 소망이 없는 세상 나라를 앞세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기도하면 시대적 상황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기도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현명인목사>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