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편지]-욥기(1/4)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에게...
나의 계획은 곧 나 "여호와"요, 내 자녀에게 나의 생명을 주는 이도 바로 나 "여호와"로다. 네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네게 주는 생명이 거룩함이라는 사실이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자기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내가 그를 벌하는 방식이다. 지옥으로 가든 말든 방치하고 유기하는 것이지. 지옥은 그들이 자기 방식을 영원히 지속하다가 가게 되는 유황 불못이다.
이 세상에서는 네가 원하는 길로, 네 마음 내키는대로 간다고해도,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네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가는 내내 즐겁고 기분이 좋든, 슬프고 괴롭든 네 방식을 고수한 너는 그 길 끝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한다. 그 책임의 시한은 영원이다. 네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결코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천국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에게 고난을 준다. 그러나 그 고난은 나를 생명의 유일한 근원으로 알고 나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그들은 거룩하게 되어가고, 나의 잔치에 참예하여 내 영의 리듬에 맞춰 춤 출 준비를 하게 된다. 곧 내가 베푸는 잔치의 맛있고 풍성한 음식을 맛 볼 미각을 미리 일깨워 주는 것과 같다. 나는 이 방식을 영원히 지속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네가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나를 알아가는 이러한 거룩한 고난의 신비를 통해서만 네 이해 속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교만한 태도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욥기를 읽으면서 네가 다음의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거룩으로 가는 고난의 신비를 지나 내 앞에 서게 되면, 마침내 나를 신뢰하게 되고 내 안에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며, 나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깨지고 소망이 주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너는 아무런 목적도 없어 보이고,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잔인하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고난만이 나를 향한 신뢰와 믿음의 성장 을 이루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은 내 마음을 엿볼수 있는 믿음이다.
설명이 주어진 고난은 네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소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나는 나 이외의 모든 소망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으로 가는 좁은 길, 내 잔치에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네가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 길은 너무나 어두워서 나를 신뢰할 만한 모든 이유들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둠 가운데 빛이 있다. 너는 그 빛을 찾아 목마름으로 따라가야 한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유일한 샘이 될 때 비로소 그의 영적전쟁은 시작된다. 욥은 고난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며, 앞으로도 신뢰할 만한 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너도 고난의 수렁에 빠져 있을때 이와 같은 질문이 네 입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나를 알아 갈 수가 없다.
내 말을 잘 듣거라. 나는 네가 원하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내가 네 인생을 즐겁게 해주고, 늘 편안한 인생을 보장해 줄거라고 믿지 말거라.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었던 나의 종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이 보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재난이 닥친다. 재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간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마치 발전기의 도체를 만지면서 전기 감전이 안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장 깊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걸 위해, 필요하다면 고난도 허용하고, 때로는 일부러 고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수준 이상의 고난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고난을 허용하지만 내가 겪은 고난 이상의 고난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항상 그 보다는 작다.
갈보리를 보거라. 내 아들을 보거라. 내 아들과 나는 너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내가 준비한 천국 잔치에 너를 데려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다. 그 때 우리는 네가 결단코 경험하지 못 할 고난을 겪었다. 지금도 우리는 잔치가 시작될 때까지, 연회가 준비될 때까지, 너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있다.
욥의 친구들은 나를, 속도 위반만하면 스키터를 발부하는 교통경찰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데, 제가 얼마나 주님께 헌신하며 살았는데 제게 이러십니까? 적어도 제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주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라고 원망한다. 그러한 원망의 부르짖음은 하늘의 음악을 묻어 버린다.
욥은 친구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이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지 못했다. 욥은 내가 '능력은 있으나 선한 하나님은 아니신가?'를 생각하며 두려워 떨었다. 그래서 나는 전능하지만 사랑 없는 신의 손 안에 우주가 맡겨져 있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곳이 있겠느냐는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을 욥에게 어쩔 수 없이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비로소 욥은 설명 할 수 없는 어두운 고난 속에서 깨달았다. 자기는 나를 고발할 수 있는 검사가 아니고, 나 역시 피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욥에게 전하는 나의 메시지는 곧 네게 주는 메시지다. 나는 네가 가장 어두운 상황 속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너의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다.
너는 나를 신뢰하거라. 그래야만 네가 나를 제대로 알게 된다. 불빛이 꺼질 때, 고난 때문에 좌절이 올 때, 공허감과 허무와 곤경에 빠질 때, 나를 신뢰하거라. 네가 나를 신뢰하면 나는 네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을 벗겨낸다.
너는 곧 나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둠이 가장 깊어질 때 샛별이 빛나며, 빛은 그 밝기를 더하게 된다. 힘들게 오르는 언덕이 있지만 그것은 힘차게 내달릴 수 있는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은 강한 바람을 만나면 더욱 활활 타오르고, 거센 파도가 위대한 선장을 만들어 낸다. 네가 겪는 말 못 할 고난의 자리에서 내 아들을 바라 볼 때, 나를 보게 되고 나의 존전에 있는 네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아들이 온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보낸다. 고난은 그들이 나를 치열하게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도록 도와주는 자양분이 되게 한다. 이것이 내가 이번 편지에서 네게 하고 싶은 말이란다. 내가 네게 준 복들을 네 삶의 근원으로 여기지 말고, 오직 나만이 네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깨닫고 내게 나아오너라.
네가 나와 사랑에 빠질때 네 삶의 모습이 어떠할지 궁금할 것이다. 그 해답은 다음 편지에서 말해 주도록하마.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둘람복음공동체SN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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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_개역개정, KJV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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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kmah commentary_기독지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