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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3~16 [사랑의 희생, ‘빛과 소금’의 삶] - 1~2

Adullam 2021. 8. 4. 11:57

■ Adullam Ministry & Church?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랑의 희생, ‘빛과 소금’의 삶]-1~2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어두운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조금씩 더가까이 나아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쉽게 말씀드리면 “너희는 이런 부패한 세상에서 꼭 필요한 소금처럼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런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훤하게 비춰 줄 수 있는 빛처럼 살아야 한다”가 됩니다.

여기서 '너희‘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열 두 제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는, 세대를 불문한 인류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 역시도 여기에 속하고, 이 땅과 열방의 모든 신실한 교회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그 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너무도 초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놓고 마치 이 세상의 운명이 그들의 어깨에 놓여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당시의 제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혼탁하고 어두운 세상의 실체인 거대한 맘몬 괴물 앞에 서있는 우리도 작고 초라한 존재들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면 꽉 막힌 어떤 벽에 봉착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어디를 봐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무지 빛을 발한다거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선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만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비밀이 많고 거짓과 이기주의로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7:9/킹제임스흠정역). ¶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이 극도로 사악한 것을 아시면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팔복을 통해 제자들에게 사람의 성품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 주셨습니다.

"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고, 화평케 해야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항목들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의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5장 1-5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러한 마음을 가진 다음에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고. 세상의 빚이 될 수 있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순서를 취하신 것은, “너희들이 이와 같은 팔복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 된다면 너희는 충분히 이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있고 소금이 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말씀드리면 우리가 팔복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나팔을 불고 다녀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지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검과 같은 말씀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묻지도 않습니다. 또한 온 몸을 바치는 헌신적인 사역에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 성도들, 곧 교회에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과 삶과 인격에서 주님을 보길 그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에게서 작은 예수를 보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닮지 않은 사람들의 논쟁은 마치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의 소리와 같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품 속에 예수님이 있는지 주목해봐야 합니다. 내 심장이 떼어지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뛰고 있는지 귀기울여 들어봐야 합니다. 내 언행이 삶 속에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내 안에 사는이 예수 그리스도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임을 날마다 고백하고 기도”하며 주님 주신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도 우리에 대하여 '당신을 보니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익한 신학적 논쟁을 그치고, 교단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신학적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극에 달한 사악한 인간의 마음들이 사단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펜데믹도 그러하고 연장선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큰 성 바벨론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사랑의 희생입니다.





[사랑의 희생, ‘빛과 소금’의 삶]-2

► 세상의 소금

소금은 짠맛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짜니까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대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세포를 감싸는 세포막이 있습니다. 그 세포막은 반투과성(semi-permeable)을 띱니다. 반투과성이란 물은 자유롭게 드나들지만 녹아있는 용질의 통과를 제한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용질은 오로지 막 속 관문에 비유되는 운송시스템을 통해서만 운반됩니다. 이를 ‘능동수송’과 ‘수동수송’이라는 학술용어로 표현합니다.

모든 생명체의 세포내 용질의 농도는 약 0.9%정도입니다. 세포를 이 보다 높은 소금용액 등에 담가두면 막을 통해 물이 빠져나옵니다. 물의 이동은 항상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세포내부의 물은 줄게 되고 세포질의 용질농도는 차츰 높아지는 것입니다.

물의 이동은 내외의 농도가 평행이 될 때가지 진행됩니다. 일정시간 지나면 세포내부의 물이 빠져나와 세포는 위축됩니다. 이 때 내부의 용질농도는 0.9%이상으로 증가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생명체는 활동을 멈춥니다. 이는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는 현상과 같습니다. 숨이 죽은 배추를 다시 맹물에 담그면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미생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금물에서는 내부의 물이 빠져나와 세포는 쪼글쪼글하게 위축되고, 내부의 농도는 진해집니다. 이를 '원형질분리'라고 합니다. 이때 미생물은 죽지는 않지만 생육은 저지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를 막는 원리이며, 음식을 소금에 절이면 썩지 않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지중해 연안은 고온 지역입니다. 그래서 식품을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소금을 무척 아끼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썩지 않게 하는 이 방부제의 특성은 예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끼치는 감화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마치 소금의 짠기가 들어가 고기나 음식물의 신선도를 유지하여 썩지 않게 하듯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우리에게서 스며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좋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 세상의 빛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빛은 직선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빛은 어둠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주저함 없이 어둠을 뚫고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우리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도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5:8-9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주 안에서 빛이며 또한 빛의 자녀인 것을 세상은 어떻게 알까요? 우리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착한 행실을 보고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입은 세마포 곧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보고 알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는 “소금이나 빛은 고사하고 죄악된 냄새만이라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책감에 고개를 떨구는 곤고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너희는 빛이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의 실제적 신앙생활은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할까요? 바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금식과 예배 그리고 교회와 기도원은 나의 믿음을 점검하며, 영성을 강화시키며,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성령으로 덧입혀지는 거룩한 시간이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처소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경배하며,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착한 행실을 믿음 안에서 행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Maranatha!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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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 www.adullamch.org